이 시리즈를 일곱 편 써오는 동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장을 다루든 발주 경로의 마지막에는 늘 현지 생산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는 20년에 걸쳐 축적된 현지화가 있었고, 미국에는 뉴저지와 펜실베이니아 공장이, 태국에는 3배로 증설되는 신공장이, 인도네시아에는 현지 생산 거점이, 베트남에는 2026년 격상된 독립 법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럽만 비어 있었습니다. 한국 제조사의 글로벌 지도에서 유럽은 마지막 빈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빈칸이 방금 채워졌습니다. 2026년 2월, 한국의 대형 제조사가 이탈리아 화장품 제조 기업의 지분 51퍼센트를 인수하며 첫 유럽 생산 거점을 확보했습니다. 즉 유럽은 지금 막 제조 국면이 열린 대륙입니다.
수출 실적에는 어디서 만들 것인가가 빠져 있다
국내 시각이 유럽을 볼 때 쓰는 문장은 대체로 수출 실적입니다. 폴란드가 111퍼센트 늘었다, 유럽도 뚫린다. 식품의약품안전처 통계에 따르면 실제로 2025년 폴란드에 대한 수출은 2억 8241만 달러로 전년 대비 111.7퍼센트 증가했습니다. 대단한 숫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는 어디서 만들 것인가가 빠져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관점은 규제나 실적이 아니라 제조와 제품입니다. 무엇을 만들어 어떻게 발주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제조 최강자의 안방이다
그 렌즈로 유럽을 보면 완전히 다른 질문이 올라옵니다. 여기는 세계적 화장품 대기업들의 홈그라운드이고, 세계 1위 수출국 프랑스의 안방입니다.
식약처 통계 기준 프랑스의 화장품 수출은 242억 8000만 달러로 세계 1위이고, 한국 114억 달러의 두 배가 넘습니다. 유럽 화장품과 퍼스널케어 소매 시장은 2024년 1040억 유로를 넘어섰고, 독일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이 역내 소비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합니다.
미국에서 한국이 프랑스를 제치고 수입 1위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미국이라는 제3의 시장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유럽에서는 그들의 안방에서 그들과 붙습니다.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과 유럽 방식으로 증명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시장조사기관들에 따르면 유럽의 K뷰티 시장은 2025년 약 27억 달러에서 2026년 약 29억 달러로 연 6퍼센트에서 9퍼센트대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성장의 이유입니다. 여러 조사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동력은 임상적으로 입증되고 피부과 테스트를 거쳤으며 클린한 제품에 대한 수요이고, 특히 규제 진입장벽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성장한다는 점입니다. 독일이 연 5.9퍼센트로 성장하는 동력도 클린뷰티와 더마 테스트입니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국의 강점인 제형과 감촉은 유럽에서 입장권일 뿐이고, 그 위에 유럽식 증거의 문법을 얹어야 비로소 경쟁이 됩니다.
용기를 빼고 제품을 설계할 수 없다
이 시리즈의 다른 어떤 편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입니다. 유럽에서는 포장이 제품의 일부입니다.
유럽 클린뷰티 시장은 연 10.8퍼센트로 성장하는데, 그 성장의 축에는 재활용 가능하고 리필 가능하며 생분해되거나 플라스틱이 없는 포장에 대한 소비자 선호가 있습니다. 여기에 포장과 포장폐기물에 관한 규정이 얹히면 포장은 더 이상 마케팅 요소가 아니라 설계 요건이 됩니다.
동남아나 미국에서는 내용물이 승부처였고 용기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제형을 다 만든 뒤 용기를 고르면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선케어조차 평가법부터 다르다
한국의 대형 제조사는 유럽 시장 전략 품목으로 선케어와 베이스 메이크업을 내걸었고, 유럽 선케어 시장을 겨냥해 차세대 자외선차단 평가법을 도입했습니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케어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카테고리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선케어로 유럽에 들어가려니 평가 방법론부터 새로 갖춰야 했다는 것입니다. 제형이 좋으냐가 아니라 그 좋음을 유럽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측정했느냐가 관문인 셈입니다.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유럽에서 가장 흔한 실수는 제형만 들고 안방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부처는 유럽에 팔 수 있나가 아니라, 이제 막 열린 현지 생산이라는 선택지를 누가 먼저 쓰나입니다.
그래서 발주 상담의 첫 문장이 달라져야 합니다. 국내에서 잘 나가는 이거 주세요가 아니라, 이 제형을 유럽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증명할 수 있고 용기까지 함께 설계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 편은 규제 실무를 다루지 않습니다. 유럽의 등재 절차와 안전성보고서, 책임자 지정, 포장 규정에 관한 실무는 화장품 안전성 평가 제도 시리즈와 포장 규정 시리즈에서 별도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편에서 다룬 다섯 개 신호의 전체 분석과 그로부터 도출한 세 개의 공백, 그리고 제품 방향과 규제, 발주 경로로 옮긴 역산 자료는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윤수만의 화장품 실무 인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